<11장 : 점령>

두 남매는 밤새 흙먼지를 뒤집어 쓴 채 말을 달렸다.

해도리스 마을의 환호성과 바르톨로뮤가 남긴 기만적인 웃음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듯했지만,

지금은 거친 말발굽 소리와 심장이 터질 듯한 불안감만이 두 사람을 채찍질했다.

동이 틀 무렵.

익숙한 능선을 넘어가며, 마을의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카라와 마데는 말의 고삐를 당기며 동시에 멈춰 섰다.

이윽고 가쁜 숨을 몇 번 고르던 두 사람은 서서히 안장에서 내려 조심스레 땅을 밟았다.

히히힝~!

언덕 위에서 내려다본 고향은 지옥의 풍경이었다.

마을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가 새벽의 여린 빛을 삼키고 있었고,

매캐한 타는 냄새가 바람을 타고 언덕 위까지 밀려와 코끝을 찔렀다.

그 중심에는 해골과 연기가 그려진 블랙 스모크의 깃발이 마치 망령처럼 나부끼며,

처절하게 유린된 마을의 자태를 적날하게 보여주는듯 하였다.

검은 연기(Black Smoke)

배경이미지 출처 : 무료 이미지 사이트 Pixbay, 로고 출처 : 오빗

아...

카라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은 비명도, 절규도 아닌 공허한 탄식이었다.

손가락 끝에서 힘이 빠져나가며,

그토록 아끼던 쌍권총 중 하나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흙바닥으로 떨어졌다.

다리가 풀린 그녀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눈앞의 광경이 3년 전, 샌드스톰의 마지막 날과 겹쳐 보이며,

자신이 방아쇠를 당겼던 그날의 비극이, 또다시 자신의 존재로 인해 되풀이되고 있었다.

뭐 하나 바뀌지 않았어..

자신이 영웅으로 칭송받는 허영의 시간에 갇혀 있을떄,

이곳에서는 소중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을 잔인한 현실이 그녀를 산산조각 냈다.

마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흐느끼듯 떨리는 그녀의 어깨 위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카라는 그 손길에 겨우 숨을 삼키며, 부서질 듯한 목소리로 오빠를 올려다보았다.

오빠...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내가... 내가 방아쇠를 당기기 시작했을때 부터야...?

마을을 떠났을때부터?

난.. 모르겠어..흐으..윽...

마데는 그런 카라를 잠시 바라보다, 떨리는 그녀의 손등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

그리고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타오르는 마을을 바라보았다.

모든 감정이 짓눌려지고, 단단하게 굳어버린 결의만이 깊은 불빛처럼 눈동자 속에서 고요히 타올랐다.

그 시각, 마을 광장.

상황은 절망적이었지만, 의외로 공기는 묘하게 늘어져 있었다.

약탈자들은 승리에 취해 술독을 깨부수고 있었고,

광장 분수대에는 두 남자가 꽁꽁 묶인 채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아이고, 허리야...

무기. 손목을 비틀어서 빠져나갈 수 있겠나?

내쪽은 장난을 심하게 쳐놔서 도저히 풀 수 가 없을거 같아.

보안관 류지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비틀린 자세를 고쳐 앉으려 애썼다.

밧줄이 어찌나 꼼꼼하게 묶였는지,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빳빳한 코트가 구겨질 대로 구겨져 있었다.

에고.. 이쪽도 무리입니다..

그보다 보안관님.. 아니 류지? 손목 쓸린거 이거는 산재처리 할게요?

또.. 근무 시간 외에 발생한 납치 및 감금이라 노무 규정을 좀 찾아다가 결제 올려두겠습니다.

이 상황에서 규정 타령이냐?..

그보다 저 녀석들, 내 비상금 숨겨둔 서랍은 안 뒤져야 할 텐데...

그때, 멀리서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소란스러운 광장을 헤치고 푸른 피부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류지의 보안관 배지를 옷깃에 당당히 꽂은 채,

반질거리는 피부와 정수리의 외로운 머리카락 한 올이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등장만으로 분위기를 슬쩍 비틀어 놓는, 3형제중 막내. 코아노였다.

헤에~ 이거 봐. 꽤 잘 어울리잖아?

역시 보안관 배지는 간지가 있어야지.

안 그래요, 보안관님?

그러고는 태연하게 류지의 정강이를 툭툭 건드렸다.

류지는 짜증이 솟구친 듯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어이, 찰 거면 좀 살살 차지 그래?

그리고 그 배지 거꾸로 달았어.

허세만 넘치고 지식은 하나도 없는 멍청이자식아.

뭐, 뭐라고?!...

류지의 가벼운 도발에 넘어간 코아노가 욱하며 발을 치켜들려 하자,

뒤편에서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그를 제지했다.

그만해라, 코아노.

품위 떨어지게 굴지 마.

마을 회관의 계단 위, 류지가 평소 애용하던 흔들의자에 거만하게 앉아 있는 남자.

블랙스모크의 리더이자 첫째, 코라였다.

그는 류지가 아끼던 최고급 시가를 입에 문채 연기를 길게 뿜어내며, 태연한 표정으로 주변을 내려다봤다.

우리는 양아치가 아니야 코아노.

'복수자'들이지.

저기 저 반쯤 무너진 주점에 우리 귀중한 인질들이 숨어 있는거 다~ 안다고

그런데도 왜 안건들이는건지 생각해봐.

한꺼번에 터뜨리면 죽일 수고가 덜잖아 안그래?

이 미친새끼...

그 계집이 이곳에 도착할 때까지,

우린 이 마을을 무대처럼 정돈해 두면되.

관객이 지루해하면... 그건 연출자가 무능한 거잖아?

코라는 다가오는 짜릿한 복수의 순간에 쾌락을 느끼며,

시가를 씹듯 거칠게 입에 담고, 흔들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그때, 한 부하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두목!!! 코티.. 코티형님이 살아 계십니다!!!

뭐..?

형님이 살아 있다고?! 지금?!

부하는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돌아 뛰어가기 시작했다.

코라와 코아노는 서로 짧게 눈빛을 교환한 뒤, 살아 있는 코티를 확인하러 움직였다.

코라, 코아노 형제가 사라진, 부하들이 즐비한 광장 구석.

하수구 맨홀 뚜껑이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들썩였다.

녹슨 쇠 틈새로 두 쌍의 눈동자가 조심스레 바깥 세상을 훔쳐보고 있었다.

리오와 털뭉이었다.

리오는 경계하듯 고개를 내밀어 주변을 훑었다.

포박된 류지가 아직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하자, 굳어 있던 어깨가 희미하게 내려앉았다.

휴우... 다행이야.. 류지형이랑 무기는 아직 무사해.

털뭉아 우리 둘이 나가서 싸우면 이길 수 있을까?

네가 시선 좀 끌어주면 내가...

흐으윽.. 끄읍....

털뭉아?

저기... 저 놈들이...

내 술창고를 털고 있어... 내 피 같은 아가들을 바닥에 쏟아버리고 있다고!! 흐어엉....

아니야.. 됏다...

눈물적신 털뭉이의 모습을 보고서는 리오는 더 말을 잇지 않았고,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맨홀 뚜껑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다시금 칠흑 같은 어둠과 시궁창 냄새가 두 사람을 감쌌다.

그때였다.

훌쩍거리던 털뭉은 가방을 주섬주섬 뒤지더니, 무언가를 소중하게 꺼내 들었다.

어둠 속에서도 미약하게나마 반짝이는 술병이었다.

그래도... 내 보물 1호들은 꺼내올 수 있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리오의 눈이 털뭉이가 소중하게 꺼내든 5병의 술병에서 멈췄다.

강렬하게 용이 불을 뿜는듯한 표지와 그 아래로는 70의 살벌한 도수가 적힌 특제 밀주 '드래곤 브레스'.

머릿속에 번쩍하고 한 줄기 아이디어가 스쳐 지나가며, 입가가 천천히 올라갔다.

털뭉아...

음? 왜..왜..? 리오 갑자기 눈이 무서워 졋어.. 리오?!

털뭉이는 불안감에 몸을 떨며 본인의 보물 1호들을 품에 꼭 끌어안은채로, 리오를 바라봤다.

리오의 손은 발발 떠는 털뭉이의 술병을 덩달아 꽉 움켜쥔 상태였다.

바로 그거야!!

리오는 털뭉의 어깨를 와락 움켜쥐며, 눈을 번뜩였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희망이, 말 그대로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30분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마데는 바들바들 떨고 있는 카라의 뺨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초점 없는 눈동자는 아직도 3년 전의 화염 속에 갇혀 있었고,

마데는 그녀의 고개를 억지로 들어 올려 자신의 시선과 마주하게 했다.

카라. 나 봐.

평소의 장난기 어린 말투는 전혀 없었다.

낮고, 묵직하고, 흔들림 하나 없는 목소리였다.

네 잘못 아니야. 그리고 저건 3년 전 샌드스톰도 아니고.

하지만... 불이... 또 사람들이...

그래, 불타고 있어. 하지만 아직 안 끝났어. 류지 형님도, 무기도, 리오도, 털뭉이도. 다 저기 있어.

다 죽었을거야.. 나떄문에 전부!!!!

아니. 살아있어.

카라의 포효 섞인 절규가 공기까지 떨리게 했지만,

마데는 묵묵히 받아내고는 말로 돌아가 호신용 샷건을 꺼내 들었다.

평소라면 총만 봐도 겁을 내던 오빠가,

아무렇지 않게 꺼내들어 손에 들고 있는 모습을 보니 이질감이 들었다.

우리가 안 가면, 저 사람들은 진짜 죽어.

그때야말로 네가 두려워하는 일이 현실이 되는 거야

전부.. 죽었을지도 몰라...

일어나. 내 동생은 겁쟁이 아니잖아.

저깟 불, 우리가 꺼버리자고.

마데가 손을 내밀었다. 카라는 멍하니 그 손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통증이 정신을 갉아먹던 공포를 조금씩 몰아내려 애쓴다.

가녀린 손이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마데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마을의 광장으로 보이는 지점, 불기둥과 함께 나무판자와, 흙먼지가 하늘 높이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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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라! 우리 마을에 함부로 침입한 부랑자 녀석들아!!! 불바다 축제다! 위후!!!

아, 안 돼! 내 아가! 3년 숙성시킨...

조용히 해, 털뭉아! 이 '아가'들이 형을 살릴 거라고!!!

리오의 악에 받친 고함과 함께, 불붙은 술병이 포물선을 그리며 류지를 감시하던 부하들에게 떨어졌다.

와장창-!!!

히..히끅...으...으아악! 뜨거워! 뭐야?!

헛..것을 보나.. 너무 많이 먹은게 분명해..

뭣들해!!! 현실이라고!! 빨리 불꺼!!!!

깨진 병에서 쏟아진 70도짜리 독주에 불이 옮겨붙으며, 광장 한복판에 거대한 불기둥이 치솟았다.

폭발적인 화염이 반쯤 취한 블랙스모크 조직원들을 덮쳤고, 순식간에 광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언덕 위,

치솟는 불기둥을 바라보던 카라는 문득 깨달았다.

저 불길은 모든 것이 무너지는 징조가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희미한 희망이라는 것을.

그것은 파괴의 불이 아닌. 저항의 신호탄이었다.

마데가 씩 웃으며 샷건을 어에 걸쳣다.

타이밍 한번 죽이네. 가자, 카라!

<12장 : 무너지지 않을 각오>

마데는 짧게 심호흡을 하더니, 언덕의 가파른 경사면을 향해 거침없이 몸을 던졌다.

모래먼지를 휘날리며 미끄러져 내려가자, 정장 자락이 바람에 펄럭였고

균형을 잡으며 제법 능숙한 손놀림으로 샷건의 약실을 열었다.

철컥, 척.

붉은색 슬러그 탄환이 약실로 빨려 들어가며

마데는 자연스럽게 조준경을 들어 목표를 포착했다.

저 아래, 갑작스러운 불기둥에 당황해 우왕좌왕하는 '블랙스모' 조직원들의 등이 보였다.

완벽한 기습의 기회.

이거나 먹어라, 야만인들아!

쾅!!!!!

하지만 방아쇠를 당기려는 찰나, 눈을 질끈 감아버렸고,

육중한 총성과 함께 탄환은 엉뚱한 허공을 갈라 저 멀리 있는 선인장 하나를 박살냈다.

광장의 불길에 정신이 팔려 있던 그들은 등 뒤에서 들려온 굉음에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뭐야?!

저기다! 언덕 쪽이야!

침입자다! 쏴버려!!

수십 개의 살기 어린 눈동자가 마데를 향했다.

마데는 그제야 슬며시 한쪽 눈을 뜨고는, 자신을 향해 정조준되는 총구들을 보며 굳어버렸다.

어... 친구들...? 우리 대화로 해결 하지 않을래?

침입자는 죽어라!!!

적들이 방아쇠를 당기려던 절체절명의 순간.

마데의 등 뒤, 더 높은 곳에서 흙먼지 폭풍이 일었다. 카라였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경사면을 질주하며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타앙! 타타탕! 탕!

카라가 쏘아 보낸 총알들은 적들의 미간이 아닌,

그들이 쥐고 있던 라이플의 노리쇠와 권총의 총신을 정확하게 타격했다.

챙! 카앙! 퍽!

으악! 내 손!! 끄아악!!!!!

끄윽.. 총이... 총이 박살 났어...

야.. 파란머리.. 저새끼 설마..?

순식간에 선두에 있던 네 명의 조직원이 무기를 떨어뜨리며 손을 감싸 쥐었다.

카라는 마데의 앞을 가로막은채 착지했고, 모래바람이 그녀의 발끝에서 원을 그리며 퍼져나갔다.

카라의 시선은 흔들리는 조직원들을 넘어, 연기가 피어오르는 마을 광장 쪽을 향했다.

중심부에서 들려오는 고함, 총성, 그리고 저항의 흔적들.

그것은 절망적인 풍경이 아니었다.

살아있어.

그녀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억누르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려는 불안감을 억지로 짓눌렀다.

식은땀이 흐르는 손으로 권총 손잡이를 다시 꽉 쥐었다.

공포는 여전했지만, 지금은 그것을 마주할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기최면을 걸듯 주문을 외우며, 주저앉은 마데를 일으켜 세웠다.

잔뜩 폼 잡더니.. 여전하구나 오빠는..?

에고고.. 삭신이야.. 안하던 짓은 할게 못되네 진짜..

이대로 골목을 돌파할거야. 뒤쳐지지 말고 따라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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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의 눈동자가 다시금 서늘하고 날카로운, 총잡이의 빛을 띠기 시작하며,

전력이 깔린 대로를 피해, 반쯤 무너진 건물 사이로 몸을 낮추며 달려들었다.

벽돌 더미가 부서진 창문 아래로 흘러내렸고, 타버린 우편함과 금 간 간판이 바람에 흔들렸다.

꺄아악! 살려주세요!

골목 안쪽, 허름한 나무 상자 뒤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블랙스모크 조직원 둘이 숨어있던 빵집 아주머니를 끌어내고 있었다.

이봐, 조용히 해! 카란지, 뭔지 도착하기 전까지는 안죽인다니까?

돈 될만한 게 어디 있는지 불기만 하라고!

골목의 희미한 불빛 아래, 두개의 긴 그림자가 점점 짧아졌고.

조직원들이 움찔하며 돌아보는 사이, 마데가 카라 옆을 빠르게 추월해 앞으로 나섰다.

숙녀분에게 그렇게 거칠게 굴면 못쓰지.

쾅-!!

마데는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또 반사적으로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고막을 때리는 굉음에 어깨가 움츠러들며 산탄은 적들을 맞추는 대신,

놈들의 머리 바로 위에 달려있던 낡은 여관 간판의 사슬을 정확히 끊어버렸다.

끼익, 쿵!!

으악?!!!! 이건 또 뭔데!??!

육중한 나무 간판이 떨어지며 적들의 앞을 가로막았고, 놈들은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어..어떠냐 이것들아!!!

의도치 않은 사태에 마데가 어안이 벙벙하듯 뻘쭘하게 굳어버렷고, 그 틈을 카라가 놓칠 리 없었다.

마데의 옆을 스치듯 지나가며 미끄러지듯 슬라이딩했고, 먼지 구름 속에서 두 자루의 권총이 춤을 췄다.

타앙! 탕!

간판 밑에서 허우적대며 일어나려던 적들의 어깨와 허벅지에 정확히 구멍이 뚫리며,

비명과 함께 그들은 무기를 놓치고 쓰러졌다.

휴.. 카라랑 마데구나 정말고마워!! 진짜 멋있었어!!

빵집 아주머니의 감사가 카라의 귓가에 박히자.

순간, 카라의 시야가 흔들렸다.

선셋 페스티벌의 화려한 조명 아래서 자신을 향해 쏟아지던 거짓된 환호와 박수 소리가 겹쳐 들렸다.

샌드스톰의 영웅... 웃기지도 않아.

위산이 역류하는 듯한 메스꺼움이 올라왔지만, 카라는 고개를 세게 저어 망상을 떨쳐냈다.

지금은 과거의 악몽에 잠길 시간이 아니었다.

안으로 들어가세요. 뒤돌아보지 말고.

카라는 짧게 대꾸하고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마을 중앙과 가까워질수록 적들의 저항은 더욱 거세졌고.

골목의 끝, 탁 트인 대로변에는 모래주머니를 쌓아 만든 임시 진지가 보였다.

투두두두두두-!!

진지속 기관총의 포구가 불을 뿜었고, 낡은 수레와 벽돌담이 톱밥처럼 갈려 나갔다.

마데가 기겁하며 벽 뒤로 몸을 구겨 넣었다. 정면 돌파는 불가능했다.

히이익! 저건 반칙이잖아! 류지녀석은 뭐하고 있었던 거야!

카라의 푸른 눈동자가 빠르게 전장을 스캔했다. 우회로는 없다. 시간도 없다.

오빠, 3초 뒤에 오른쪽으로 뛰어.

뭐?! 미쳤어? 저건 벌집이 되라는 소리잖아!

걱정 마. 오빠는... '바람'보다 빠르니까.

카라는 마데의 등짝을 거칠게 떠밀었다.

마데는 비명인지 기합인지 모를 소리를 지르며 엉겁결에 튀어 나갔다.

으아아아! 나는 평화주의자라고! 이 야만인들아!

화려한 정장 차림의 남자가 샷건을 허공에 휘두르며 뛰쳐나오자,

기관총 사수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그쪽으로 쏠렸다.

저 미친 놈은 뭐야? 쏴버려!

그 찰나의 틈이었다.

카라는 바닥을 미끄러지듯 슬라이딩하며 골목 반대편으로 몸을 날리고는 총을쐇다.

탕! 탕! 타앙!

그녀의 총구는 적들의 심장이 아닌, 어깨와 허벅지, 그리고 기관총의 급탄 벨트를 정확히 노렸다.

끄아악!! 내 다리...!!!!

기관총이 침묵하고 사수들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쓰러졌다. 카라는 멈추지 않았다.

바닥을 박차고 일어나며 다시 전력 질주했다.

오빠! 계속 달려! 멈추면 죽어!

하아, 하아... 카라! 너 진짜 나 죽일 셈이지?!

마데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카라의 뒤를 따랐다. 골목 구석구석에서 지원 요청을 받은 잔당들이 튀어나왔다.

저깄다! 잡아!

비키라고!

마데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샷건을 난사했다.

콰앙!

산탄은 적들의 머리 위 폐허의 지붕을 작살냈고, 무거운 나무 합판이 떨어지며 적들을 덮쳤다.

나이스 샷.

뭣들하는거야!!! 상대는 고작 두명이라고!!!

카라는 칭찬과 동시에 달려드는 적의 손목을 쏴 무기를 떨구고,

그대로 가속도를 이용해 명치를 걷어찼다. 퍽! 적이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카라는 물 흐르듯 이동하며 적들의 무릎과 어깨를 꿰뚫었다.

살상은 피하면서도 전투 불능으로 만드는 그녀의 사격술은 전성기 시절보다 더욱 날카로워져 있었다.

적들이 고통에 신음하며 바닥을 구르는 사이, 두 남매는 폭풍처럼 적진을 돌파했다

저 앞, 화염과 연기가 자욱한 광장의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출처 : 무료 이미지 사이트 Pixbay

으아아악! 내 엉덩이! 불 꺼! 불 끄라고!

광장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리오와 털뭉이가 하수구 맨홀 뚜껑을 방패 삼아 살짝 들어 올릴 때마다,

시커먼 연기와 함께 불붙은 술병이 곡사포처럼 날아들었다.

내 30년산 위스키가! 저게 한 병에 얼마짜린데!!!!

털뭉은 피눈물을 뚝뚝 흘리며 술병을 붙잡고 있었다.

떨리는 손끝으로 심지를 꽂는 동안 얼굴은 울음범벅이었지만,

그렇게 완성된 술병은 곧 리오의 손으로 넘어갔다.

나중에 마데 형한테 청구해! 지금은 던지는 게 남는 거야!

리오는 털뭉이를 격려하며, 눈물로 만든 그 술병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손목을 휘두르며 깔끔하고 정확한 포물선으로 광장 중앙에 떨어뜨렸다.

술병이 요란한 소리를내며 꺠졋고, 거대한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불길이 거세지자 분수대 근처의 온도가 급격히 올라갔다.

류지는 굵은 밧줄에 묶인 채 땀을 비오듯 흘리며 투덜거렸다.

젠장, 리오 이 자식. 구해주러 온 거야, 바베큐를 만들러 온 거야? 이러다 타 죽겠다고...

류지가 밧줄을 끊어보려 안간힘을 썼지만, 놈들이 어찌나 단단히 묶어놨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밧줄은 물에 젖은 가죽 끈인지, 마르면서 더 옥죄어오고 있었다.

류지. 가만히 좀 계십시오. 밧줄이 더 파고듭니다.

그 와중에도 무기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아니, 지루한 서류 작업을 처리하는 회사원처럼 건조했다.

야, 넌 이 상황에 침착함이 나오냐? 지금 우리 꼴이 통구이 직전인데!

업무 중 돌발 상황은 언제나 발생하기 마련이죠. 그리고... 초과 근무 수당은 확실히 챙길 겁니다.

무기는 묶인 손목을 기묘하게 비틀었다. 그의 소매 단추, 커프스링크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뭐 하는 거야?

제가 항상 말했잖습니까. 현장직은 장비 관리가 생명이라고.

틱, 탁.​

무기의 소매 안쪽에서 아주 얇고 날카로운 칼날이 톡 튀어 나왔다.

평소 서류 봉투를 뜯거나 연필을 깎을 때 쓰던, 그가 애지중지하는 은제 사무용 나이프였다.

그는 류지의 등 뒤로 손을 뻗어 밧줄의 매듭 부분을 더듬었다.

류지, 3시 방향으로 몸을 15도만 기울이십시오. 각도가 안 나옵니다.

이... 이렇게?

좋습니다. 움직이지 마세요. 제 슈트 베이면 세탁비 청구합니다.

서걱, 서걱.

불길이 타오르는 소리에 묻혀 칼질 소리는 들리지 않고,

무기의 손놀림은 정교하게 가장 장력이 강하게 걸린 밧줄의 급소를 정확히 썰어내고 있었다.

한편, 불을 끄던 잔당 하나가 그들의 수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어? 저것들이 꼼지락거리는데?

놈이 몽둥이를 들고 다가오자 류지의 눈이 커졌다.

야, 무기! 빨리 좀 해봐! 고객이 컴플레인 걸러 온다!

민원 처리 완료.

툭.

경쾌한 소리와 함께, 류지의 상체를 조이던 밧줄이 끊어지자.

류지는 튀어 오르듯 몸을 일으키며, 다가오던 잔당의 턱을 박치기로 치며 단숨에 한 명을 기절시켰다.

끄억!..윽..

놈이 비명도 못 지르고 쓰러지자, 류지는 놈의 허리춤에서 리볼버를 빼앗아 들었다.

무기 역시 스르르 풀린 밧줄을 바닥에 떨구고, 옷매무새를 탁탁 털며 일어났다.

그는 품에서 안경을 꺼내 쓰며 쓰러진 적의 라이플을 집어 들었다.

자, 이제 밀린 업무를 처리해 볼까요.

류지와 무기는 등을 맞대고 섰다. 불타는 광장 한복판, 두 남자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13장 : 가족의 이름으로>

이봐, 무기! 업무 일지 작성해! 야근수당은 두둑이 챙겨줄 테니까!

이미 초과 근무 시간입니다, 류지! 어느새 출근시간이라고요!

어이! 저녀석들 풀려놧어!! 그냥 쏴버려!!!

류지와 무기는 불타는 장작더미와 깨진 분수대 잔해를 엄폐물 삼아 몸을 날렸다.

그들의 머리 위로 빗발치는 총탄이 대리석 조각을 튀겼다.

광장 바닥, 정확히는 그 '밑'에서 기묘한 엄호 사격이 이어졌다.

끼이익

광장 구석의 배수구 틈새가 살짝 열리더니, 긴 총신 하나가 쑥 튀어나왔다.

타앙-!

으악! 뭐야, 발 밑에서?!

끄아악!!! 내.. 내 발이!!!!!

적의 돌격대장 하나가 발등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지하 하수도 안, 리오는 머스킷의 총열을 식히며 씩 웃었고,

털뭉은 땀을 뻘뻘 흘리며 다음 탄환과 화약을 건네고 있었다.

툭, 탁.

장전 완료! 리오, 3시 방향 맨홀로 이동하자! 여기 연기 차서 숨 막혀 죽겠어!

오케이, 털뭉! 놈들 발바닥에 불 좀 질러주러 가자고!

두 사람은 두더지 잡기 게임의 두더지처럼 신출귀몰하게 하수구 라인을 타고 이동하며,

적들의 진열을 흐트러뜨렸다.

지상에서는 블랙 스모크의 정예 간부들이 불길을 뚫고 류지와 무기가 숨은 엄폐물을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저 쥐새끼들을 잡아! 포위해!

양손에 도끼를 든 간부와 샷건을 든 간부가 좌우로 갈라져 압박해 들어왔다.

류지는 훔친 리볼버의 실린더를 튕기며 엄폐물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출처 : 무료 이미지 사이트 Pixbay

탕! 탕!

크윽!

달려오던 간부의 어깨가 젖혀졌다.

류지의 노련한 조준은, 머리를 노리는 대신, 확실하게 무력화시킬 수 있는 관절과 무기를 쥔 손을 노렸다.

무기! 상황 보고해! 짧고 굵게!!

류지가 적의 제압 사격을 피해 다시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

옆에 쭈그리고 앉은 무기는 쏟아지는 탄피 속에서도 안경을 추어올리며,

마치 결재 서류를 읊듯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현황 브리핑하겠습니다. 첫째, 민간인 피해 현황.

무기는 적의 라이플을 들어 엄폐물 너머로 견제 사격을 가하며 말을 이었다.

탕!

사망자 제로, 부상자 소수.

주민들은 습격 직전 대부분 대피 완료한 것으로 파악됩니다.

하! 그거 아주 좋은 소식이군. 계속해!

그 말에 류지의 입가에 안도의 미소가 번졌다. 가장 걱정했던 부분이었다.

둘째, 군수 물자. 방금 노획한 라이플1정, 리볼버1정. 탄약은 총 70발.. 충분합니다.

셋째, 적 병력 규모...

무기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는 잠시 총성을 듣고 적의 위치를 가늠했다.

광장에만 최소 40명 이상. 후방 지원 병력까지 합치면 꽤 많은 숫자입니다. 하지만...

쾅!!!!!!

리오가 던진 술병이 터지며 솟아오른 불기둥에 적들이 비명을 질렀다.

지휘 체계가 엉망입니다. 우리 쪽 '두더지'들 덕분에 혼란 상태죠.

좋아. 서류 검토 끝. 이제 '현장 집행' 들어간다.

탕! 탕!!

류지는 엄폐물을 박차고 일어났다. 그의 리볼버가 불을 뿜었고,

무기 역시 정교한 사격으로 류지의 사각지대를 커버했다.

무기! 우측 놈들 다리 묶어! 내가 중앙 뚫는다!

결재 승인은 진작에 됏다구요. 알겠습니다!!

두 남자의 콤비 플레이가 광장의 화염 속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털뭉! 장전!

아, 알았어! 제발 재촉 좀 하지 마! 화약 쏟는단 말이야!

광장 구석의 맨홀 뚜껑이 덜컹 열리더니, 리오의 머스킷이, 춤을 추듯 회전하며 튀어 나왔다.

타앙-!

총알은 적이 엄폐물로 쓰던 마차의 바퀴 살을 스치고 굴절되어, 숨어있던 적의 정강이를 정확히 강타했다.

어디서 쏘는... 끄아악!! 내 다리!!!!

나이스 샷! 다음, 2시 방향!

리오는 두더지처럼 쏙 들어갔다가 5미터 떨어진 다른 하수구 구멍에서 다시 튀어 나왔다.

신출귀몰한 저격에 적들은 바닥만 쳐다보며 우왕좌왕했다.

지상에서는 류지와 무기의 콤비 플레이가 절정에 달해 있었다.

철컥, 투다다!

무기는 노획한 라이플의 볼트를 기계적으로 당기며, 류지의 사각지대로 접근하는 적들을 하나씩 제거했다.

안경 너머의 눈빛은 서류 오탈자를 찾아내는 감사관처럼 냉철했다.

류지!, 4시 방향 근접!

무기의 경고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류지는 바닥으로 몸을 던졌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길게 슬라이딩한 류지는 적의 도끼날을 간발의 차로 피했다.

어딜!

이걸 피해?! 크헉..

류지는 미끄러지던 관성을 그대로 이용해, 적의 오금을 걷어찼고,

중심을 잃고 휘청이는 적의 턱에 류지의 어퍼컷이 꽂혔다.

적이 거품을 물고 쓰러진것을 확인한 류지는 곧바로 몸을 굴려 옆의 나무 상자 뒤로 숨자,

방금 서 있던 자리에 총알 세례가 쏟아졌다

후! 위험해라.. 무기, 엄호 계속해!

류지는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엄폐물 사이를 넘나들며 적의 시선을 끌고,

가까이 붙은 적은 유도 기술로 메다꽂거나 관절을 꺾어 제압했다.

이 쥐새끼 같은 놈들이... 다 같이 날아가 버려!!

류지!! 피해요!!!

광장 반대편, 잔뜩 독이 오른 '블랙 스모크'의 간부가 품에서 시뻘건 다이너마이트 묶음을 꺼내 들었다.

무기가 비명을 질렀지만, 류지는 막 적 하나를 메치느라 자세가 무너진 상태였다.

퍼어어어엉!!!!!!!

굉음과 함께 류지가 의지하던 대리석 조각상 엄폐물이 산산조각 났다.

폭발의 충격파가 류지를 덮쳤고, 그는 공중으로 붕 떴다가 바닥으로 거칠게 나뒹굴었다.

크헉...!

삐이이이-----------

류지의 귓가에는 날카로운 이명만이 울려 퍼졌다.

폭발의 충격으로 세상의 소리가 차단된 순간,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갔다.

자욱한 먼지 속,

류지는 귀가 먹먹해지는 이명과 함께 가쁜숨을 토하며 비틀거렸다.

그의 앞을 가려줄 엄폐물따위 없는 완벽한 무방비 상태.

뿌연 먼지 구름 사이로, 하수구 뚜껑을 박차고 나오려는 리오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리오의 눈가는 찢어질 듯 일그러져 있었고,

그 뒤에서 털뭉이 필사적으로 리오의 허리춤을 붙잡고 늘어지는 모습이

젤라틴 속에 갇힌 것처럼 느릿하게 보였다.

류지!!

류지형!!

이 미친놈아! 지금 나가면 벌집 된다고! 진정해!

놔! 이거 놓으라고! 류지 형이!!!

무기가 라이플을 난사하며 달려 나오려 했고,

하수구 아래에서 리오가 이성을 잃고 계속 비명을 질러댄다.

바보 녀석들... 나오면 죽는다...

폭발의 연기 너머로, 류지를 날려버린 간부가 샷건을 장전하며 류지의 코앞까지 걸어왔다.

류지의 흐릿한 시야에 시커먼 총구가 가득 찼다. 간부의 입이 잔인하게 찢어졌다.

류지는 체념한 듯 눈을 감지 않았다.

그저 그 끝을 똑바로 응시했다.

뒤져라.

그떄였다.

타-앙!!!!

간부의 손에 들려있던 샷건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허공으로 튕겨 나갔다.

크하악...끅.... 누구냐! 어떤 놈이야!!!!

간부가 손목을 부여잡고 비명을 지르는 사이,

자욱한 연기를 뚫고 검은 그림자 하나가 매처럼 비상했다.

공중에서 두 바퀴를 회전하며 착지한 인영은 양손에 든 쌍권총을 십자로 교차하며

간부의 양어꺠를 겨냥했다.

놈이 아니라... 년이다. 버러지 같은 녀석아.

탕! 탕!

망설임 없는 더블 탭. 간부는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뒤로 꼬꾸라졌다.

뒤이어 묵직한 샷건 소리와 함께 마데가 류지의 앞을 가로막으며 남은 잔당들을 향해 포효했다.

늦어서 미안해, 류지! 손님 맞이 준비가 좀 늦었어!

카라...! 마데...!

무기가 울먹이며 소리쳤고, 하수구 뚜껑이 열리며 리오와 털뭉이 튀어 나왔다.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되자, 남은 조무래기들은 카라의 살기에 기세가 눌려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치더니.

이내 도망가기 시작했다.

저..절떄 못이겨..

도망쳐!!!! 두목을 불러!!! 어서!!!

모든 간부가 쓰러지자 와해된 집단은 광장을 벗어나 흩어지기 시작했고.

상황이 정리되자마자 카라는 바닥에 주저앉은 류지에게 달려갔다.

류지! 어디 크게 다친곳은 없어?!

평소라면 안부정도만 묻고 지나칠 녀석이 과할정도로 걱정하는 모습에 류지는 당황하지만,

피 묻은 입가를 닦으며,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본인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콜록... 늦었잖아, 은퇴하기 딱 좋은 날씨였는데 말이야.

그 농담에 팽팽했던 긴장의 끈이 끊어졌다.

무기가 라이플을 내리며 안도했고,

리오는 숯범벅이 된 얼굴로 달려와 마데, 류지를 한꺼번에 껴안았으며,

털뭉마저 훌쩍거리며 그들의 등 뒤에 매달렸다.

매캐한 화약 냄새와 피비린내 속에서, 서로의 체온이 느껴졌다.

카라는 떨리는 손으로 류지의 어깨와 리오의 등을 더듬어 확인했다.

따뜻했다. 그리고 맥박이 뛰고 있었다.

3년 전 그날처럼, 잿더미가 되어 사라진 환영이 아니었다. 따뜻한 피가 흐르고,

거친 숨을 내쉬는 진짜 가족들.

카라의 손에서 쌍권총이 힘없이 툭 떨어졌다.

그녀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다가가, 류지와 리오, 무기, 그리고 마데를 한꺼번에 와락 끌어안았다.

살아있어... 다들... 진짜 살아있어...

참아왔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안도감, 죄책감,

그리고 벅찬 기쁨이 뒤섞인 뜨거운 눈물이 동료들의 옷자락을 적셨다.

<14장 : 교착>

한바탕 눈물바람이 지나간 뒤,

카라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지로 삼키며 눈가를 소매로 거칠게 훔쳤다.

붉어진 눈시울이었지만, 그 눈빛만큼은 다시금 총잡이의 서늘함을 되찾고 있었다.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무기를 주워 능숙하게 먼지를 털어내고는,

절뚝거리는 류지를 부축해 분수대 턱에 앉혔다.

으으... 젠장. 근육에 무리가 간것 같아.. 바로 전투는 무리겠어..

류지가 앓는 소리를 내며 옆구리를 부여잡자, 무기는 황급히 응급처치를 했고.

마데는 엉망이 된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긴장해. 아직 안끝났어.

쿠구구구구...

카라의 시야에 중장비들이 포착되며, 전투 준비가 들어갔고,

거대한 증기 굴착기의 엔진이 짐승의 그르렁거리는 소리처럼 낮게 울렸다.

그 육중한 기계음 뒤로 검은 매연이 하늘을 가렸고,

블랙 스모크의 본대가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광장을 포위하며 들어왔다.

그들은 한 걸음씩 좁혀오며,

수십 개의 총구가 일제히, 서서히 카라의 일행 쪽으로 들어 올려졌다.

한 걸음씩 좁혀오는 그들의 중심에 서있는 세명의 남자.

코라, 코티, 그리고 막내 코아노.

침묵이 잠시 흐르는 순간, 철없는 막내 코아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헤헤, 어이. 전직 보안관 나리? 우리가 또 왓다고~ 우리 없는사이에 거하게 해드셧구만?

코아노는 손가락 끝으로 은빛 별 모양 배지를 빙글빙글 돌리며 비릿하게 웃었다.

철없는것은 맞받아친다고 했던가.

옆에 잠자코 있던 털뭉이가 반대편에 있는 코티를 보고는 반갑다는 듯이 손을 힘차게 흔들어 댓다.

어어? 코티 친구! 안녕! 나 여기 있어!

어..어.. 그..그래 안녕..

쉿! 털뭉아.. 원래 적이였잖아.. 왜그래 증말...

아니이~ 유치장 한솥밥 친구는 영원한 친구잖아~ 반갑게 인사 좀 하는데 왜애...

적진 한가운데 서 있던 코티의 얼굴이 순식간에 홍당무처럼 달아올랐다.

부하들이 의아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코티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황급히 피했다.

크, 크흠! 저, 저 못생긴 녀석이.. 뭐라는 거야! 난 모르는 놈이다!

근데 아까 아는척 하지 않았어..?(웅성웅성)

나도 들은거 같은데...(웅성웅성)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마데는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를 지우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고,

류지의 부관 무기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라이플의 조준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의 떨리는 손가락은 언제든 방아쇠를 당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류지 명령 내려주실래요?

저 배지 돌리고 있는 놈 머리통을 한발이면 날릴 수 있을거 같은데.

기다려, 무기. 아직은 때가 아니야.

류지가 낮게 읊조렸다.

그의 시선은 코아노나 코티가 아닌, 오직 한 사람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저벅, 저벅.

코라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그 단순한 동작 하나에 소란스럽던 좌중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코티도, 코아노도, 심지어 털뭉조차 입을 다물었다.

코라의 시선이 카라에게 닿았다.

3년 전의 악몽을 기억하는 눈.

조직원들이 아는 '보스의 죽음' 그 이상의, 뼈저린 상실감이 담긴 눈동자였다.

카라.

드디어 네 낯짝을 볼 수 있는 날이 왔어.

동굴처럼 깊고 굵은 목소리가 광장을 울렸다.

기억할라나 모르겠네?

'샌드스톰'을.

네년이 부순 우리들의 고향...

그 불지옥의 냄새가 아직도 내 코끝에서 진동을 하는데 말이야.

카라는 마른침을 삼켰다. 압도적인 중압감. 그것은 단순한 힘의 차이가 아니었다.

죄책감이라는 족쇄가 카라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나는 마을을 불태우지 않았어...

변명은 필요 없다.

코라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등 뒤로 도열한 수십 명의 부하들이 일제히 노리쇠를 당기는 소리가 들렸다.

철커덕!

그때처럼,

이번에는 네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어줄게.

명령이 떨어지기 직전의, 가장 위태로운 1초였다.

당장 찢어죽여도 시원찮지만

질문 몇가지는 답해줘야겠어.

왜 내 동생은 살려뒀지? 그리고 왜 지금 방아쇠를 당기지 않는 거냐?

그의 물음에 카라가 입술을 떼었다. 그녀는 천천히 총구를 내리며,

옆에 서 있는 마데를, 그리고 뒤에서 자신을 믿고 기다려주는 동료들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지긋지긋하니까.

카라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피로 피를 씻는 건... 3년 전으로 충분해.

나는 더 이상 누군가의 도구가 되어 살육을 반복하고 싶지 않아.

너희가 잃은 것에 대해선 사과할게.

그러니까... 이제 그만하자, 코라.

그것은 진심이었다.

과거의 망령에서 벗어나, 복수의 연쇄를 끊기위한 본인의 방식.

하지만.

뚝.

코라의 안에서 무언가가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기대했던 대답이 아니었다. 차라리 욕을 하거나 비웃었다면 나았을 것이다.

자신의 아버지와 같았던 두목인 '페드로'와 동료들을 화염속으로 사라진 장본인이,

이제 와서 평화를 논하고 사과를 입에 담는다는것은 그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크... 크흐흐...

하하하하하하!!!!!!!!!!

흐..흐..흐윽...하아...

역겨운 소리 집어치워!!!!

쩌렁쩌렁한 고함소리에 류지가 움찔하며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사과? 그만해? 네년이 죽인 우리 아버지가 지옥에서 듣고 피눈물을 흘리겠다!!!

이제 와서 착한 척, 정의로운 척... 그따위 역겨운 위선이 통할 줄 알았냐?!

코라는 카라의 '변화'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녀가 변했다면, 과거에 죽어간 자신의 동료들은 대체 무엇을 위해 희생된 것인가.

그 허무함을 견딜 수 없었던 코라는 결국 파국을 선택했다.

그는 절망과 증오가 뒤섞인 눈으로 하늘을 향해 팔을 쳐들었다.

다 거짓말이야... 너희들은 전부 가짜야!

몽땅 불태워버려!!!

지령 따위는 이제 필요없어!!!

이 위선적인 마을을, 저년과 함께 모조리 날려버려!!!!

이성을 잃은 코라가 쉰 목소리로 절규하듯 명령을 내렸다.

긴장감이 한계점을 넘어 폭발하려는 그 찰나의 순간.

타아앙!!!!!!!

모든 소음을 찢어발기는 건조한 총성 한 발.

거대한 산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코라의 가슴팍에 구멍이 생겨나고,

등 뒤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흙먼지 위로 붉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상황을 인지도 하지못한채로 코라를 바라보는 코티와 코아노 사이.

저벅거리며 광장으로 들어오는 한명의 남자.

실망이군요, 코라 씨. 회사는 당신들에게 '효율적인 철거'와 '확보'를 의뢰했습니다.

개인적인 복수심에 불타 마을을 잿더미로 만들라고 한 적은 없죠.

말끔한 정장의, 얇은 코안경 너머로 냉담한 시선을 깔아내리며 남자는 피웅덩이를 밟고 선다.

방금 전의 폭력을 증명하듯,

그의 손에는 연기가 가늘게 피어오르는 긴 총신의 리볼버가 느긋하게 내려져 있었다.

눈에 투지가 서리는 카라와 류지, 마데, 리오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하고.

태양이 밝게 비추는 정오와는 상반된, 차가운 바람이 그들에게 매몰아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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